성종의 행정조직의 개편_ 중앙집권제의 확립
성종대 치세의 일관된 정책은 중앙집권체제의 확립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성종은 귀족들과 제휴를 모색하는데, 제휴책으로 노비안검법을 폐지하여 광종대에 노비에서 면천됐던 사람들을 다시 노비로 환천시켜 귀족들에게 돌려주기도 했습니다.
중앙집권체제 마련을 위한 필수적인 조건은 중앙관제와 지방조직을 확립하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 성종은 집권 초기부터 말기까지 지속적으로 조직 정비 작업을 추진하게 되는데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중앙에는 3성 6부제가 정착되고 12목이 확립될 수 있었습니다.
3성 6부제는 고려 중앙관제의 토대를 이루는 제도로 3성은 중서성, 문하성, 상서성을 일컬었으며 6부란 이, 병, 호, 형, 예, 공부를 가리킵니다.
6부는 형식적으로 3성에 딸린 부속 조직이지만 그 기능적인 측면에서 보면 3성 못지않는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에 이들 조직을 따로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 3성 내에 6부가 종속된 형태였던 당나라의 그것과 차이가 있습니다.
태조대의 3성은 태봉의 체제를 답습한 독자적인 면모를 띠었고 중앙집권화보다는 호족연합체 유지 기능을 했습니다.
982년에 설치된 3성 체제는 내사성과 문하성이 내사문하성으로 통합되어 2성 체제라 보는 것이 더 정확하고 중서문하성은 중서성과 문하성 이 두 기관을 합쳐 불렀으므로 엄격히 말하면 고려는 줄곧 2성 체제를 유지한 셈입니다.
다만 형식적으로 중서성, 문하성, 상서성 등의 3성 체제였습니다.
육부의 서열은 이, 병, 호, 형, 예, 공부 순이었는데 이는 당나라가 이, 호, 예, 병, 형, 공부 순을 유지했던 것에 비해 다소 차이를 보입니다.
고려는 병부를 두 번째에 두어 병권을 중시했고 형부가 예부보다 서열상 위에 놓인 것은 변방이 불안정했고 풍속에 대한 강제성도 약했던 당시 고려 사회를 대변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수나라 문제때 제정된 3성 6부체제를 당이 계승하고 그 제도를 비록 본받기는 했지만 고려인들의 내부 실정에 맞는 독자적인 제도를 형성하려는 의지가 강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6부는 형식적으로 3성의 하급 조직이었지만 3성을 거치지 않고 국왕과 직접 연결되었기 때문에 행정제도의 중심적인 기능을 담당했는데 이는 조선에서 왕권이 강했던 태종과 세조대에 보이는 6조 직계제와 닮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중앙관제의 근간이 된 3성 6부제 이외에도 고려는 송의 제도를 본받아 3사와 중추원을 채용하고 독자적인 필요성에 의해 도병마사와 식목도감 등의 합좌기구를 마련합니다.
이러한 체제는 고려중기까지 그대로 유지되다가 무신정권 이후 중방, 정방, 교정도감 등이 설치되면서 권한과 기능이 위축되는데 1275년 충렬왕이 즉위하면서 원나라의 압력에 의해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이 첨의부로 통합되어 3성 체제는 급격히 약화됩니다.
1279년에 도병마사가 도평의사사로 개정되어 국가의 모든 중대사를 주관하게 되면서 첨의부마저 기능이 유명무실해졌다가 1362년에 중서문하성은 도첨의부, 상서성은 삼사로 각각 개편되어 3성체제는 완전히 소멸됩니다.
6부 역시 1275년 원의 압력으로 4사로 축소되었으며 도평의사사 설치 이후 그 권한이 더욱 약화되었다가 1356년 공민왕의 개혁으로 일시적으로 되살아났지만 1389년 이, 호, 예, 병, 형, 공조의 6조로 개편됩니다.
하지만 6조는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유명무실한 기구로 전락하고 맙니다.
성종대 치세의 일관된 정책은 중앙집권체제의 확립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성종은 귀족들과 제휴를 모색하는데, 제휴책으로 노비안검법을 폐지하여 광종대에 노비에서 면천됐던 사람들을 다시 노비로 환천시켜 귀족들에게 돌려주기도 했습니다.
중앙집권체제 마련을 위한 필수적인 조건은 중앙관제와 지방조직을 확립하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 성종은 집권 초기부터 말기까지 지속적으로 조직 정비 작업을 추진하게 되는데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중앙에는 3성 6부제가 정착되고 12목이 확립될 수 있었습니다.
3성 6부제는 고려 중앙관제의 토대를 이루는 제도로 3성은 중서성, 문하성, 상서성을 일컬었으며 6부란 이, 병, 호, 형, 예, 공부를 가리킵니다.
6부는 형식적으로 3성에 딸린 부속 조직이지만 그 기능적인 측면에서 보면 3성 못지않는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에 이들 조직을 따로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 3성 내에 6부가 종속된 형태였던 당나라의 그것과 차이가 있습니다.
태조대의 3성은 태봉의 체제를 답습한 독자적인 면모를 띠었고 중앙집권화보다는 호족연합체 유지 기능을 했습니다.
982년에 설치된 3성 체제는 내사성과 문하성이 내사문하성으로 통합되어 2성 체제라 보는 것이 더 정확하고 중서문하성은 중서성과 문하성 이 두 기관을 합쳐 불렀으므로 엄격히 말하면 고려는 줄곧 2성 체제를 유지한 셈입니다.
다만 형식적으로 중서성, 문하성, 상서성 등의 3성 체제였습니다.
육부의 서열은 이, 병, 호, 형, 예, 공부 순이었는데 이는 당나라가 이, 호, 예, 병, 형, 공부 순을 유지했던 것에 비해 다소 차이를 보입니다.
고려는 병부를 두 번째에 두어 병권을 중시했고 형부가 예부보다 서열상 위에 놓인 것은 변방이 불안정했고 풍속에 대한 강제성도 약했던 당시 고려 사회를 대변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수나라 문제때 제정된 3성 6부체제를 당이 계승하고 그 제도를 비록 본받기는 했지만 고려인들의 내부 실정에 맞는 독자적인 제도를 형성하려는 의지가 강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6부는 형식적으로 3성의 하급 조직이었지만 3성을 거치지 않고 국왕과 직접 연결되었기 때문에 행정제도의 중심적인 기능을 담당했는데 이는 조선에서 왕권이 강했던 태종과 세조대에 보이는 6조 직계제와 닮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중앙관제의 근간이 된 3성 6부제 이외에도 고려는 송의 제도를 본받아 3사와 중추원을 채용하고 독자적인 필요성에 의해 도병마사와 식목도감 등의 합좌기구를 마련합니다.
이러한 체제는 고려중기까지 그대로 유지되다가 무신정권 이후 중방, 정방, 교정도감 등이 설치되면서 권한과 기능이 위축되는데 1275년 충렬왕이 즉위하면서 원나라의 압력에 의해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이 첨의부로 통합되어 3성 체제는 급격히 약화됩니다.
1279년에 도병마사가 도평의사사로 개정되어 국가의 모든 중대사를 주관하게 되면서 첨의부마저 기능이 유명무실해졌다가 1362년에 중서문하성은 도첨의부, 상서성은 삼사로 각각 개편되어 3성체제는 완전히 소멸됩니다.
6부 역시 1275년 원의 압력으로 4사로 축소되었으며 도평의사사 설치 이후 그 권한이 더욱 약화되었다가 1356년 공민왕의 개혁으로 일시적으로 되살아났지만 1389년 이, 호, 예, 병, 형, 공조의 6조로 개편됩니다.
하지만 6조는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유명무실한 기구로 전락하고 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