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성종(成宗)의 업정과 서희와 강동 6주

고려 성종(成宗)의 업정과 서희와 강동 6주




서희는 광종대에 대광 내의령을 지낸 서필의 아들입니다.
서필은 광종의 귀화인 중용정책에 반대했던 인물로 사치를 싫어하고 스스로 검소하여 몇 번에 걸쳐 왕의 사치를 경계하는 간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서희는 광종 11년에 18세로 갑과에 급제한 후 광평 원외랑 등을 지내며 승진을 거듭하였습니다.

972년 송나라 사신으로 십여 년간 단절되었던 송과의 외교관계를 회복시키면서 처음으로 외교 능력을 인정받았습니다.
송의 태조는 서희의 절도있는 행동과 예법을 높이 평가하여 검교부상서 벼슬을 내렸습니다.

송나라에서 돌아온 후 서희는 탁월한 업무 능력을 인정받았으며 좌승을 거쳐 983년에 정3품 병관어사에 올랐습니다.
993년 그가 정2품 내의시랑에 있을 때 거란이 침입하자 증군사에 임명되어 시중 박양유와 문하시랑 최량과 함께 북계(지금의   평안북도)로 진출하여 방어전략을 세웠습니다.

당시 거란은 요를 세우고 막강한 힘을 형성하여 중원을 압박하는 동시에 고려와 여진에도 압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고려는 거란과 외교를 단절하고 송과 접촉하였고 거란은 이에 불만을 품고 동경 유수 소손녕으로 하여금 고려를 침공케 하였습니다.
이에 고려는 응징을 결의하고 성종이 직접 서경에서 진을 쳤고 서희 등이 북계를 수비하였습니다.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한 소손녕은 일시에 봉산군을 격파하였으며 많은 고려군을 포로로 잡았고 고려 조정에 서한을 보내 항복을 종용했습니다.

소손녕은 자신들이 이미 발해를 멸망시켜 고구려땅을 차지하고 있는데 고려가 고구려땅 일부를 차지했기에 자신들은 영토를 되찾기 위해 정벌에 나섰다고 주장했습니다.

서희가 이 서한을 접하고 화의의 가능성이 보인다고 성종에게 보고하자 성종은 이몽전을 보내 화의를 타진했지만 소손녕은 고려가 항복하면 화의에 응하겠다고 답했습니다.

소손녕은 80만 거란군이 도착했음을 알리면서 노골적으로 힘을 과시했기 때문에 고려 조정에선 항복하고 서경 이북의 땅을 거란에게 넘겨주고 황주에서 절령까지를 국경으로 하자는 견해(할지론)가 지배적이었습니다.

"전쟁의 승패는 병력이 강하고 약한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적의 약점을 잘 알고 움직이면 충분히 승리할 수 있습니다......"
서희의 강력한 반대로 적의 군용으로 쓰일지도 모를 쌀을 대동강에 버리라는 명령이 거둬지자 서희는 고구려의 옛땅을 내주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며 끝까지 싸울 것을 주청하였습니다.

성종은 소손녕의 면대요청에 응하기로 하고 서희를 적진에 보냈는데
소손녕은 국서를 가진 서희에게 뜰에서 절을 하라고 말했습니다.

"뜰에서 절하는 것은 신하가 임금을 대할 때만 있는 일일 뿐 양국의 대신끼리 대면하는 좌석에서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서희가 거절하자 그 당당함에 감복한 소손녕은 결국 당상에서 대면하는 예식절차를 통해 대화를 할 수 있었습니다.

소손녕은 두 가지를 요구하였습니다.
첫째는 고구려의 옛땅은 거란에 속한 것이니 내놓으라는 것이었고
둘째는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요나라를 섬기지 않고 왜 바다 건너 송나라를 섬기느냐고 말하면서 그것에 대한 해명을 요구했습니다.






이에 서희는 고려는 국호로 이미 고구려를 계승하고 있으며 또한 고구려의 수도 평양을 국도로 정하고 있음을 내세우면서 고구려 옛땅이 거란의 영토라는 주장에 반격을 가했습니다.
오히려 거란이 동경으로 삼고 있는 요양이 고구려의 땅이므로 고려에 복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거란과 고려가 통교하기 위해서는 외교를 방해하는 여진을 쳐야 하고 여진이 머무르는 지역에 성을 구축하고 길을 통할 수 있도록 거란이 도와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서희의 강변은 먹혀들었고 소손녕은 더이상 반박하지 못하고 자신의 왕에게 보고하여 고려와의 화의를 승낙받음으로써 일단 거란과 고려의 전쟁은 종결되었습니다.

서희는 거란과 대등한 힘을 형성한 다음 외교 관계를 성립시켜도 늦지 않다는 실리적인 면에 치중하고 있는 반면 성종은 무엇보다 전쟁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화의가 우선이라며 정치적 안정을 먼저 고려하여 거란에 예폐사를 파송하려고 한 외교에 대한 관점 차이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소손녕과의 담판 이후 거란과의 화의가 성립되었고 서희는 이듬해부터 압록강 동쪽 장흥진, 귀화진, 곽주, 구주 등에 강동 6주의 기초가 되는 성을 구축하여 여진을 몰아내는데 성공합니다.

이로써 고려는 생활권을 압록강까지 확대하였으며 이때 구축한 강동 6주는 후에 조선이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까지 뻗어가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이후 서희는 종1품 태보내사령에 임명되었으나 996년(성종 15년) 병을 얻어 성종이 죽고 난 목종 원년(998년)에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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